재일조선인, 역사 그 너머의 역사 - 미즈노 나오키, 문경수(2015)
도쿄제국대학에서 공부한 김사랑(金史良, 1914~951)의 작품 <빛 속으로>가 아쿠타가와상 후보가 된 것은 1940년 상반기의 일이다. 재일조선인 아이가 처해 있던 상황이 묘사된 재일조선인 문학의 효시로 평가된다. (73p)
소개지인 미야기 현에서 그날을 맞은 역사학자 강덕상도, 조선인들이 해방을 축하하며 모여든 집은 "그곳만이 다카다 시내의 지도에서 분리된 것 같은 모습으로 휘황하게 불이 켜져 있었고, 와와.. 마시고 노래하는 소리로 시끌벅적했습니다." - <재일 1세의 기억>, 오구마 애이지, 강상중 (103p)
1941년, 열여덟 나이에 일본에 건너 온 신격호(시게미쓰 다케오)는 암시장에서 화장품을 팔아 벌어들인 돈을 밑천으로 주식회사 롯데를 창립했다. 1950년대에는 껌 업계에 진출했고, 마침내 제과업을 중심으로 한국과 일본을 넘나드는 대재벌로 성장하게 된다. <'재일'이라는 삶의 방식>, 박일 (110p)
시기에 따른 차이가 있지만, 점령군이 재일조선인을 점령 질서를 저해하는 요인으로 보고 있었던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시각은 1946년에 들어서 재일조선인과 공산당의 연대가 뚜렷해짐에 따라 한층 더 강화된다. 조선인은 암시장에서 막벌이를 하고 폭력적이어서 범죄율이 높으며, 밀입국을 통해 전염병을 옮겨 와 패전과 혼란으로 생긴 우리의 비참한 상태를 먹이(시이쿠마 사부로 진보당 의원, 1946년 8월)로 삼는다는 이야기가까지 나오는 상황이었다. 점령군 검열관은 신문지상을 시끄럽게 만드는 이런 히스테리컬 캠페인을 묵인했다. 리처드 미첼에 따르면 이런 태도는 점령군 스스로 반조선인 감정과 친일적인 의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재일조선인의 역사>, 리처드.H.미첼 (125p)
한편 전쟁으로 인한 철이나 구리를 비롯한 자원 수요는 재일조선인들에게 생각지도 않았던 수입원이 되었다. 니가타에서 반전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홍려표는 동포들이 화염병이나 고추폭탄을 만들고 시위를 벌이는 한편으로 생계를 위해 고철을 주웠다고 한다. "나오에쓰스텐레스였는지 대일본소다였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젊은이들이 밤중에 그곳 쓰레기장에 가서 구리 선이든 폐품이든 닥치는 대로 주워 모았지요. 그것을 생활비나 운동 자금으로 보태 썼습니다. 전쟁 반대를 외치면서 총탄 원료가 되는 그런 물자를 팔았으니 모순이었지요." 라고 홍씨는 회상했다. 앞의 책, <재일 1세의 기억>, (143p)
4월혁명은 민단 사회를 심각하게 동요시켰다. 이미 귀국 사업이 본격화한 1960년부터 시즈오카, 오사카, 교토 등 각지에서 민단을 집단 탈퇴해 총련으로 달려가는 일이 줄을 잇고 있었다. 이승만 정권을 퇴진으로 몰아간 한국 학생들의 투쟁이 민단 산하의 학생과 청년에게 가져다준 충격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컸다. (170p)
1973년 8월 8일, 김대중이 도쿄 구단시타에 있는 호텔 그랜드팰리스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206p)
1971년 서씨 형제(서승, 서준식)가 서울대학교에 유학하던 중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육군 보안사령부에 체포 구금되었다. 취조 중에 고문을 받은 서승은 자살을 기도하다 안면에 화상을 입었다. 공판장에 나타난 서승의 모습에 자이니치 사회가 받은 충격은 엄청났다. 서씨 형제는 모두 비전향을 관철하다가 한국이 민주화된 이후에야 석방되었다. 재일조선인이 간첩으로 체포당하는 사건은 1980년대의 신군부 정권 시대까지 계속되어, 확인된 것만으로도 피해자 수는 100여명에 이른다. 유신 독재가 자이니치 2세 사회에 던진 어두운 그림자를 상징하는 것이 문세광 사건이었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을 기념하는 서울의 행사장에서 자이니치 3세 문세광이 오사카 부 경찰서에서 훔친 권총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해 함께 자리한 부인 육영수가 총탄을 맞고 사망했다. 그 자리에서 체포된 문세광은 서울지방법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고 12월 20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사건 자체는 지금도 여전히 알 수 없는 부분이 많지만 '민족' 이나 '사회'에 눈을 떠서 극한의 삶을 살아간 자이니치 2세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자이니치 사회에 던진 파문은 적지 않았다. (207p)
한국 정부는 국내 유일의 이문화 집단이라고도 할 수 있었던 화교들의 국적 취득을 거의 허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무역이나 토지 취득과 관련해 화교들을 심하게 차별함으로써 그들을 몰락으로 내몰았다. 그래서 1970년대 중반에는 수많은 화교들이 한국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한창 많을 때는 10만 명 수준이었던 그 인구도 2만여명으로까지 감소했다. 일체의 이물 혼입을 허용하지 않는 폐쇄적인 민족주의는 당연히 '국민으로서의 소양' 이 결여된 자이니치 2세나 3세, 나아가 1990년대 들어 급증한 중국 조선족에 대한 시선도 규정해 왔다고 할 수 있다. (24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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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을 배제하고 사료를 엮었는데도 구성이 유려하고 잘 읽힌, 좋은 책